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단 편집) ==== 카를로스 1세 ====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재위 1516년~1556년.]가 즉위했다. 일반적으로 카를로스 1세를 통합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으로 본다. 그의 치세를 거치면서 스페인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러나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할 당시 스페인의 분위기는 외국 출신의 새 국왕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레콩키스타]]를 거치며 유럽에서 가장 민족의식이 높았던 스페인 사람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했던 카를로스 1세를 이방인(네덜란드인 또는 독일인)이라고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어([[스페인어]]) 및 [[카탈루냐어]]와 [[로망스어군|계통적으로 가까운]] [[프랑스어]]를 모어로 썼지만... 카를로스 1세는 왕위를 물려받고 나서도 스페인의 상황이 두려워 1년 반이나 스페인으로 입국하지 못한 채 부하들을 먼저 보내 현지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에야 스페인에 입국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제위 초기에 카를로스 1세가 장기간 신성 로마 제국에 머물면서[* 황제 선거 및 [[대관식]],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문제 등이 산적하여 계속 신성 로마 제국에 머물러야 했다.] 카스티야에서 과중한 전쟁 물자를 징발하자 결국 스페인(주로 카스티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신성 로마 제국에 계속 머물고 있던 카를로스 1세는 반란이 크게 확산되자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각지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후 스페인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구축했다. 카를로스 1세는 한 곳에 고정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영지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스페인에서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낸 편이다. 카를로스 1세는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카스티야 지방에 머물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스페인을 통치했다.[* 카를로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처음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 후아나 카스티야 여왕이 아직 생존해 있었던 관계로 카스티야 쪽 왕위 계승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 있었는데 카스티야 의회의 인준 등의 절차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카스티야 왕궁의 중심지인 톨레도와 바야돌리드에 정착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영토 중 카스티야가 인구와 경제력에서 있어서 가장 컸다. 게다가 카스티야의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금]]이 유입되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를 그의 통치--착취--의 중심지로 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황제가 머무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높았지만 인구 자체는 적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터진 각종 문제들도 결국 지배층인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의 인구가 제국 전체의 25%에 불과한 한계 때문이었다.] 또 [[톨레도]]는 스페인 국토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통치하기 가장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를 막 끝냈을 당시 스페인의 교통 사정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떠나 스페인에 도착한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열악한 교통 상태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는 등 무척 고생했다. 카스티야와 카탈루냐가 통합 왕국이 된 지 500년이 되도록 서로 융화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스페인 내부의 교통망이 워낙 헬이라 서로 교류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 꼽힐 정도다. 어쨌든 이 때문에 카를로스 1세에게 있어서 스페인 중심에 있던 톨레도의 지리적 위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카를로스 1세 시절 카스티야가 소유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금은이 쏟아지면서 카스티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된다. 반면 카탈루냐는 경제적으로 [[지중해]]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15~16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이 급부상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침공하는 통에 지중해 무역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를 정도로 크게 위축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은 근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 지중해 무역이 어려워지자 그 대안을 찾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나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한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쇠퇴한 것 역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 인한 지중해 무역의 쇠퇴 때문이다.] 카스티야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자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를 집중적으로 털어 전비를 충당했다.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카를로스 1세는 막대한 전쟁 자금이 필요했는데, 카를로스 1세의 영지 중에서 가장 심하게 수탈당한 지역이 카스티야였다. 카스티야 지방은 카를로스 1세 제위 초기에 심각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참히 진압되었기 때문에 끽소리 못 하고 과중한 납세의 부담을 져야만 했다. 이에 비해 카탈루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과세 부담을 졌고 특히 군비 측면에서는 거의 부담을 지지 않았다. 아라곤 왕국의 세 개의 영지인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는 독자적인 법률과 도제 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상당 수준의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카를로스 1세는 이를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이처럼 카를로스 1세 치하를 거치면서 카스티야가 스페인의 중추가 된 반면 연합 왕국의 양대 축이었던 카탈루냐는 카를로스 1세가 파견한 [[부왕]]이 통치하면서 스페인의 일개 지방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술은 카를로스 1세가 카스티야를 편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경제력이 우세했던 카스티야를 더 쥐어짜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을 플랑드르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